[덕산 칼럼] 백척간두 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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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칼럼] 백척간두 진일보
  • 김덕권
  • 승인 2021.11.26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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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누구나 까마득한 절벽에 선 것 같은 절망에 빠져 본 일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 절벽에서 죽기 살기로 몸을 날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 눈앞에 눈부신 광명을 맞이하는 환희(歡喜)에 몸을 떨었지요.

옛날에 서가모니 부처님이 ‘설산동자’라는 수행자였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어디서 미묘한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제행무상 시생멸법(諸行無常 是生滅法) ‘모든 것은 무상하여 영원한 것이 없나니 이는 나고 죽는 법칙이라네.’」 설산동자는 그 뒤에 무엇이 이어지는 노랫소리가 더 있을 것 같은데 끝내 노랫소리가 없어, 노랫소리가 난 곳으로 찾아가 보니 ‘나찰(羅刹)’ 한 분이 허기가 져서 누워 있었습니다.

설산동자가 뒷 구절을 마저 말씀해 달라고 하자, 나찰은 배가 고파서 할 수 없다 합니다. 설산동자가 뒷 구절을 불러주면 자신의 몸을 먹이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제 서야 나찰이 나머지 구절을 불러 주었지요.

「생멸멸이 적멸위락(生滅滅已 寂滅爲樂) ‘나고 죽는 일이 함께 사라지면 이를 일러 고요한 즐거움이라 하네.’」 설산동자는 노래 뒷 구절을 듣는 순간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버렸습니다. 이때 나찰은 제석천(帝釋天)으로 변하여 동자의 몸을 받아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게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는 크게 죽지 않으면 크게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크게 살려하면 백척간두에서 한 발 더 내디뎌야 크게 깨칠 수 있다는 뜻이지요. <백척간두진일보!> 100척의 높은 장대 위에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간다는 의미로써, 선불교(禪佛敎)에서 나온 용어이지요.

이 말은 발전된 상태에서 안주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또 이어진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는 용기를 의미합니다. 그 높고도 위태로운 경지가 바로 백척간두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다 보면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형세가 이미 백척간두(百尺竿頭)와 같은 지경일 것입니다.

물론 ‘백척간두’는 높은 경지를 이르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미 수행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내딛듯이 해야 비로소 우주의 진리를 대각(大覺)하고 부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 : 1130~1200)는 이 말이 지닌 불교적 색채를 경계하면서도, 학문의 끝없는 진보를 드러내기에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당나라 초현대사(招賢大師)의 게송(偈頌)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백척간두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경지에 오르긴 했어도 진정한 경지는 못 되네. 백척간두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시방세계가 이 몸에 온전해지리라.」 높디높은 백척간두 위에서 발을 떼는 행위는 그나마 나를 지탱해 주고 있는 유일한 것마저 놓아버려야 비로소 진리를 깨치는 것입니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백척간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수행인은 보잘 것 없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마주하고, 이제 우리가 그 동안 믿고 의지해 왔던 것에서 발을 떼어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을 향해 새로운 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이렇게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한 상태를 우리는 ‘돈오(頓悟)’라고 합니다. 생사 심(生死心)이 끊어지고, 아상(我相)이 사라지는 것을 생사심의 종말, 즉 돈오라고 합니다. 이러한 돈오로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나(我)’ 즉 생사심이 완전히 죽었음을 스스로 안다.

둘째, 그동안 ‘나’에 가리워져 있던 ‘저것’이 있음을 안다.

‘저것’은 생각 사이의 여백과 바탕입니다.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예전처럼 기능하지만, 이제는 거기에 주인공 노릇을 하던 주체적인 실체가 없습니다. 무의식의 인과(因果)에 따른 탐⸳진⸳치(貪瞋癡)와 습(習)이 예전처럼 계속 일어나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주체(‘나’)가 없어졌으므로, 일어난 후에도 그러든지 말든지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이렇듯 수행을 할 때에는 내가 뭔가를 깨달아 탐⸳진⸳치에서도 벗어나고, 무한한 자유를 얻는 것으로 기대합니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탐⸳진⸳치가 아니라 ‘나’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자유로와지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돈오’는 수행의 인과가 점차 쌓이다가 벼락같은 체험으로 일어나는 수도 있고, 깨달은 줄도 모르고 있다가 문득 돌아보니 일이 다 끝나있음을 아는 수도 있습니다. 즉, 수행인마다 다른 것이지요.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구도기(求道記)를 읽고 그런 체험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거나, 체험이 있어야만 깨달음일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옳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 체험에 붙잡힐 위험도 있는 것이니까요. 특히 예전에 생각을 굴리던 습관이 여전히 작용하여, 돈오로 깨달은 ‘저것’을 깨달음의 대상으로 다시 붙잡고 추구하는 일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돈오’는 의식의 전환이자 세상을 보는 시각의 바뀜이며, 자기 내면의 대 혁신입니다. 그동안 펄펄 살아있던 ‘나’가 죽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공부나 사업 간에 백척간두 진일보하는 마음으로 정열을 불사르면 이루지 못할 일은 없지 않을 까요!

단기 4354년, 불기 2565년, 서기 2021년, 원기 106년 11월 26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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